긴 손가락 거북 인간은 퇴근 후 뭘 하나?

이종민

너는 손가락이 길어서 게으를 거야. 엄마가 내게 종종 하시던 말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손가락이 긴 건 맞다. 게으르진 않은데, 느려서 게을러 보일 뿐이다.
내가 동물이라면 거북이나 나무늘보일 테다. 아무래도 장수하는 거북이가 낫겠지. 거북 인간은 중고 명품 매장에서 일한다. 당연히 빠릿빠릿해야 한다. 정가품 감정 할 때도. 적정한 매입가를 찾을 때도. 관악구 녹두거리 언덕을 오르는 150cc 스쿠터처럼 덜그덕거린다. 혼미한 하루 끝에 늘어진 카세트테이프가 된다. 제 속도를 되찾아 줄 커피 한 잔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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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림동의 6평짜리 분리형 원룸에 산다. 여기저기 숨겨 놓은 기물을 꺼내는 데 한 세월 걸린다. 주방 찬장의 원두와 컵, 하부 수납장의 드리퍼와 서버, 신발장 위 (분리형이지만 신발장과 주방이 분리되어 있다고 한 적은 없다) 드립 포트. 비좁은 주방에 한 지붕 네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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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 무게를 재고, 물을 끓이고, 필터를 적시고, 그라인더를 돌리고, 커피를 내린다. 드리퍼를 싱크대로 밀어 넣고, 서버에 담긴 커피를 잔에 따라야 겨우 한 잔이 나온다. 절로 나오는 한마디, ‘다 했다~.’
벌려놓은 설거지를 언제 할지 걱정이 된다. 그래도 내일이면 또 물을 끓이고 있겠지. 하나에 집중하는 감각이 좋으니까. 어제보다 맛있어지길 바라는 순간이 기다려지니까.
중학생 때 ‘모리사와 아키오’의 소설 <무지개 곶의 찻집>을 읽었다. 커피에 맛있어지라고 주문을 외우는 사장님이 등장한다. 험한 마음이면 맛도 없어진다나. ‘이게 뭐야.’ 생활기록부에 뭐라도 채워야겠단 심산으로 읽었던 내 삐딱한 한 줄 평. 그게 10년이란 시간을 넘어 내게 영향을 미칠 줄이야. 지금은 나도 주문을 외운다. (너무 이상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혼자 살고, 혼잣말할 권리가 있다) 날 이렇게 바꿔준 당시 교육 제도에 감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좀 중얼거린다고 정말 맛있어지나? 꼭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카페에서 먹는 그 맛이 안 난다. 어떤 날은 너무 오래 추출해서 한약만치 썼고, 어떤 날은 분쇄 정도를 잘못 설정해서 영 밍밍했다. 그럼에도 ‘너 이렇게 하면 안 돼!’ 삿대질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이러니 오히려 더 잘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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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과 욕심이 담긴 한 잔을 마신다. 여전히 아니다. 그래도 덕분에 원래 보폭으로 돌아왔다. 커피를 내리는 순간에는 날 번잡하게 만드는 온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몰두해야 하니까. 몇 달 동안 지지고 볶으며 얻은 가장 좋은 점이다. 나와 드립커피가 이렇게나 잘 맞다니! 잠시 바리스타의 꿈도 꿨지만, 카페에서 일한다면 당장 쫓겨날 거북 인간은 망상을 그만뒀다.
서버를 다 비웠다. 능실능실 설거지를 한다. 행주로 싱크대 물기를 닦고, 주름진 마음도 잘 다렸으니, 이제는 잘 시간이다. 문명의 이기인 22도 에어컨 바람 아래서 파삭한 여름 포단을 덮고 푹 자야지.
눕기 전 여담. 쓰고 있는 그라인더와 컵 이야기. 그라인더는 봉천동 카페 ‘하이레인’ 사장님 추천으로 구매한 코만단테의 ‘C40 MK4’. 당근마켓 닉네임 ‘강사장’으로부터 34만 원에 구했다. 최고의 소비였다. 처음 쥐었을 때 결국 언젠가 이걸 사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컵은 성수동1가 ‘내러티브 오브젝트’에서 샀다. 김동표 작가가 야생 흙으로 만들었다. 거친 흙 입자가 살아 있는 잔에 멀끔한 커피를 마시는 건 색다른 흥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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