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로 배운 삶의 진리
자취방에 피아노를 들였습니다. 4월 말에 구매했으니 어느덧 2달 가까이 됐네요.
피아노를 들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연히 들은 피아노 곡이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유튜브에 '작곡하는 경영학도'라고 편곡 장인으로 유명한 분이 계신데요, 그 분의 'Devil's Etude'를 듣고 흠뻑 빠져버렸죠.
잘 모셔오긴 했는데,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려니 손이 영 안 따라줬어요. 피아노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싶었달까요.
한 곡만 매일 1시간씩 연습했는데 완곡까지 두 달이 걸렸습니다.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적으로 칠 수 있다' 정도지, 미스터치(잘못된 건반을 누르는 실수) 없이 치려면 더 연습해야겠더라고요. 여기에 섬세한 강도 표현까지 더하려면 시간이 더 걸리고요.
전 생각이 많은 사람인데, 보통 피아노 칠 땐 생각이 비워지거든요? 근데 이번 곡은 치는 게 어렵다보니 생각이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새삼스레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요.
깨달음 1 : 정직하게, 꾸준히. 요령 따윈 없다.
피아노는 연습량에 따라 실력이 늡니다. 일상 속 몇몇 일들은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요령이나 운으로 넘길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피아노는 사실상 불가능해요. 요령? 그런 거 없습니다. 연습 부족하면 바로 티나고요, 조금만 쉬어도 공백이 느껴질 정도예요. 날고 긴다는 피아니스트들 조차 '꾸준히 연습하지 않으면 실력이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고 하니 말 다했죠. 어떻게 보면 고독한 싸움이기도 해요.
제가 들었던 웃긴 말이 있는데, 음대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피아노학과 학부생들이래요. 피아노는 혼자서 죽어라 연습하다보니 웬만한 '악바리' 아니면 살아남지 못해서 다들 성격이 억세다고요. 전 음대를 다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만큼 피아노가 힘든 악기라는 방증이기도 하겠죠.
깨달음 2 : 모든 것은 단계가 필요하다. 너무 욕심내지 말자. 천 리 길도 한 걸음 부터.
'Devil's Etude'는 빠르게 칠수록 매력이 살아나는 곡이에요. 음을 빠르게 연주해 선율을 만드는 흑건 기반 곡이다보니 느리게 치면 특유의 맛이 안 살죠.
저도 몇 번 빠르게 연주해보려 했는데요, 충분히 손가락 힘이 단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치려니 손목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안 되는 손 억지로 붙잡고 강행했더니 미스터치는 더 심해졌고 결국 곡 자체가 망가져 버렸습니다. 머리와 다르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정말 속상했습니다. 빠른 시간 내 완곡하고 싶다는 마음만 너무 앞섰나봅니다. 평소 러닝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마라톤 나가겠다고 큰 소리 친 행위와 다름 없던 거죠.
이 문제는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더군요. 꾸준히 연습하고, 안 되는 건 억지로 하지 않았더니 손가락 힘이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안 될 때는 욕심을 내려놓고 포기한 뒤 다음을 기약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하니 어느새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칠 수 있게 됐으니까요.
불현듯 '요즘의 난 요령에만 집중하고, 욕심을 부려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데만 몰두하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전 '효율'을 추구하고 있었으니까요. 효율만 추구하느라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을 속상해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던 일인데, 겪지 않고는 나아질 수 없는 일인데, 빠르지 않다는 이유로 아쉬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죠.
전 '느림의 중요성'을 주변에 자주 얘기하고 다니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더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 사회의 '빠름'을 체화하고 있던 거니까요.
삶의 진리는 특별한 게 아닌 의외로 단순한 듯 합니다. 겉으로 티나진 않더라도 내가 쏟아부은 만큼 실력이 늘고, 욕심을 접어두고 차근차근 나아가면 결국 원하는 이상에 닿을 거라고요. 그게 곧 삶이라고요.
어쩌면 전 피아노로 인생을 배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점이 제가 피아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