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지하에서 사랑을 외치다. : 중고 LP 매장과 <A Love Supreme>

운명을 믿는가? 난 믿는다. 중고 매장을 훑을 때마다 반짝거리며 나를 찾는 이가 있다. 여기라고 손 흔드는 애틋한 연인이 있다. 영화 <너의 이름은>의 타키와 미츠하처럼 만나지도 않았는데 서로를 기다린다. 이게 운명이지, 뭐가 운명이겠는가.
내가 견우라면 LP는 직녀다. 정확히는 존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 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서. 글쓴이는 대화형 인공지능인 Gemini, ChatGPT, Copilot에게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TOP 5가 뭐냐고 물었단다. 4위와 5위 자리는 계속 바뀌었지만 1, 2위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한 건 딱 두 앨범.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 존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 전자는 익숙했다. 후자는 생소했다. 저건 손에 넣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음만 먹는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자주 가는 오프라인 매장에선 이미 품절. 온라인으로 구할 수 있지만 그건 싫고. 교보문고 핫트랙스나 YES24를 찾았지만, 완전 허탕. 얼른 내 이케아 칼락스 선반에 넣어야 하는데! 조급함만 뎅그러니 남아 있었다.
몇 주 동안 인터넷을 미치광이 풋나물 캐듯 들쑤시고 다녔다. 자연스레 힘이 빠졌다. 기다리자. 영영 재발매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6월 말 모습. 글 쓰고 있는 지금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은 2026년 북중미 월드컵 조별 예선 3차전에서 콩고민주공화국 축가 대표팀에게 패배한 뒤, 빙고 좀 하다가 짐을 쌌다. 한반도는 펄펄 끓어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에 시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렀다. 나는 AK플라자 홍대점 뒷골목 지하 중고 LP 매장으로 들어섰다. 8월 초입의 풍경.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고 매장에 갈 때 기대하지 않는 자세가 가장 큰 덕목임을 다시금 느꼈다. 애인과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들렀을 뿐이었다. 안쪽 염가 코너부터 OST, J-POP, 비틀즈, 소울, 훵크를 지나 드디어 재즈.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비닐끼리 부닥치는 착, 착, 착, 소리가 났다. 순간, 번쩍했다. <A Love Supreme>이 코앞에 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이 3초 정도 멀었다. 두 가지 이유로. 하나는 앨범 표지가 빛이 나서, 다른 하나는 가격이 15만 원이어서.

음반 한 장에 10만 원 넘게 써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 나왔다. 옆에 있는 그녀에게는 별말 안 했다. 그녀와 연남동 빈티지샵을 둘러볼 때도, 해방촌에서 마포구로 터를 옮긴 모자 전문점을 구경할 때도, 고양이와 강아지 캐릭터 소품이 가득한 문구점에 들릴 때도. 모든 순간, 주저하고 있었다. 헤어질 즈음이 돼서야 연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나, 뭔가 두고 온 거 같아.” 영화 <택시운전사>의 송강호도 아니고.
“그거 누가 사 갈 뻔했어요.” 사장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게 뭔가. LP를 감싼 비닐이 기분 좋은 바스락 소리를 내는데. 포켓몬스터 주인공처럼 속으로 외쳤다. 넌 내 꺼야!

‘지고한 사랑’이라는 뜻의 제목과 달리, 첫인상은 심심했다. 존 콜트레인의 뭉근하게 끓어오르다가 폭발하는 색소폰도, 엘빈 존스의 춤을 추듯 자유로우면서 정확한 드럼도, 지미 게리슨의 태평양같이 널찍하고 깊은 베이스도, 맥코이 타이너의 서늘할 만큼 날이 선 피아노도. 근데, 어떤 부분을 들어도 좋았다. 질리지 않아서 하루에 10번 넘게 들을 정도로. 궁금한가? 꼭 한 번 들어보길 권한다. 인생이 바뀌지 않을 수 있지만, 하루는 바뀌리라 장담한다.
여전히 운명을 믿는다. 침침하면서도 기분 좋은 흙냄새로 가득한 가게에서 그토록 원하던 걸 발견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더 기대는 건 물건과 맺은 관계다. 집으로 데려갔는데 어떤 이유로 물건과 나 사이가 토라졌다면, 이런 글은 없었겠지. 존 콜트레인의 숨결이 담긴 120g짜리 플라스틱 원반은 운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감사할 따름. 덕분에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 여름날, 나는 지하에서 사랑을 외쳤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