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빼고 살기
무언가를 좋아하면 더 잘하고 싶고, 더 깊이 파고들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성취하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정작 좋아하는 것을 온전히 즐기는 일은 어려워지기도 한다. 나에게 풍요는 더 많이 가지거나 더 잘하는 데 있지 않다. 이유 없는 책을 고르고, 언제든 그만 읽을 수 있는 자유로움 속에서 가장 풍요로운 마음을 느낀다.
성취중독자의 취미생활
나는 취미가 많다. 이것저것 해보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금방 그만두진 않는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많은 편인데, 그와 더불어 깊게 파고 싶은 마음 역시 많은 편이다. 굉장히 피곤한 스타일이다.
깊게 파고들고 싶은 마음은 취미조차 즐길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나의 뒤틀린 취미라 할 수 있다. 요가를 하면서도 요가에서 말하는 진정한 요가인으로 거듭나긴 무리인 것 같다. 항상 더 어려운 자세를 갈망하고, 몸이 잘 안 움직이면 정말이지 화가 밀려온다.
뭐 이런 마음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것도 이 덕이니까. 그래도 취미를 취미로 즐길 수 없게 되는 순간이 분명히 찾아온다는 게 참 슬프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취미생활도 스트레스 받으면서 하게 되는 거다. 스스로 갉아먹는 게 취미라 불리진 않길 바라는데 말이다.
힘 좀 빼고 살자.
이유 없이 즐길 수 있는 것
그래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 하나를 꼽는다면, 독서가 아닌가 싶다. 책 읽을 때만큼은 잘 읽어야겠다는 강박은 없다. 사실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옛날엔 책을 보면서도 항상 나의 심적 갈망을 해결해줬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아무런 목적 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독서라는 게 유독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 마치 신성불가침한 원리인 듯한 느낌이랄까.. 건강한 취미랄까.. 이동진 평론가님은 ‘영화가 술이라면 책은 물이다’라고 말하며, 영화가 사람을 뜨겁게 만든다면 책은 사람을 차갑게 만들고, 이성의 속성은 본래 차가운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개인적으로 책이라는 매체가 영화나 다른 콘텐츠보다 본질적으로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도 시장에서 팔려야하는 상품일 뿐이고, 팔리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왜곡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럼에도 나에겐 책이 더 특별하다. 이유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서.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언제든 원할 때 멈출 수 있고, 원할 때 다시 읽을 수 있다. 완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독서가 유일하다. 완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특별하게 느낀다.

책 읽기
아주 가끔 정말 읽고 싶은 책이 생기긴 하지만, 대부분 아무 책이나 읽는다. 아무 책이라 한다면 무작위적인 책을 말한다. 내가 책을 고르는 방법이라면 근처 동네 도서관에 가서 그날 기분에 따라, 적당한 두께의, 적당히 눈길을 끄는 책을 세권 정도 골라서 읽는다.
책들도 단연 인기있는 책들만 빌려진다. 어쩌면 약간의 반골기질이랄까, 그런 책들은 읽기 싫어지기도 하다. 이런 무작위적인 책을 고르면서 이 먼지 쌓인 책들에게도 읽혀질 민주적인 기회를 준다는 이상한 만족감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빌린 책 중에서 사실 대개는 읽혀지지 않는 책들이 반절 정도이고, 그 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몇 권의 책들만 읽힌다. 그 중 두껍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은 자기전 머리맡에 두는 편이다. 자기 전에 릴스 보지말고 책 읽다가 자라는 스스로의 강박이 나오는 부분이긴 하다. 반면 하루 만에 뚝딱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의 경우에는 항상 들고 다닌다. 지하철은 책 읽는 시간이다.
이런 생활을 하니 자연히 병렬독서를 하게 되었다. 원래 병렬독서가 어려웠는데 말이다. 마음을 한결 놓으니 그게 가능해진걸까 싶다.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집어 읽고, 지루할땐 덮고, 몇 날 며칠을 읽지 않다가, 어느 날은 하루종일 책만 붙잡고 있고.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읽지 않을 권리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나에게 풍요란 이런 것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여백에서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의 기분. 자유로움에서 오는 풍요.
이 정도만 누릴 수 있다면, 꽤나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힘 좀 빼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