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닿아 있기, 가닿게 하기

유예리

풍요감은 다분히 느끼는 것이다. 소유할 수도, 구매할 수도 없으며 재어보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럼 어떤 감각에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느냐 한다면, 나는 가닿게 했을 때라고 답하겠다.
 

돈 걱정 눈치 볼 필요 없다면?

여기 나를 깊이 발견하게 해준 단출한 문장 세 개가 있다.
1. 지금 이대로 살았을 때 5년 후를 생각하기. 2. 내가 정말 용감한 선택을 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 때의 5년 후를 생각하기. 3. 돈 걱정도, 남의 눈치도 전혀 볼 필요가 없을 때의 5년 후를 생각하기.
종이에 답변을 사이좋게 나열해 두고, 그 사이의 간극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인가? 마지막 문장에 대한 그림이 가장 선명하다. ‘돈 걱정도, 남의 눈치도 전혀 볼 필요가 없을 때의 5년 후’의 나는 6개월마다 도시를 옮겨 다니는 방랑자였으나, 5시 반에 일어나서 하고 싶은 운동을 하고, 아침 먹고, 글쓰기를 마친 후, 점심에는 생산적인 일을 한다. 오전이 바쁜 이유는 오후의 시간을 타인과 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저물어질 때쯤,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향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수집한다. 보따리 안, 모아둔 것을 하나둘 꺼내어 내 색깔을 입혀 다시 세상에 내어준다. 그게 반복되는 생활, 마치 방학에 그려내는 동그라미 시간표를 요상하게 지켜내는 사람.
꿈같은 상상이지만, 진정 내가 원하는 생활은 맞닿는 삶이구나. 규칙과 변칙을 오가는 하루를 살면서, 함께하는 것들을 내 시선으로 바라보고 다시 내보이고 싶은 사람이구나. 무의식이 매겨준 나의 가치는 듣고 보고 전하는 사람이었다.
답을 했던 26년 2월 그때부터 이상향이자 북극성이 되어 남았다.
 

몰랐던 그들의 모습

연구에 치여 그도 잊어가던 8월 방학 끝자락, 공부 말고는 다하고 싶었고 일이 그리워질 때 쯤이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커피를 해볼 거라는 요긴한 변명으로 카페들을 들락거리던 나에게 둘도 없는 기회가 찾아온다. ‘이 곳이라면, 공간과 맛으로 맞닿고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감이 드는 카페에서 매일 두 시간의 알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바에 선 첫 주간에는 그다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계산대에 서서 주문 받는 일이 전체이자 전부였다. ‘계산대에 서 있다면, 가게의 얼굴이 되는 거예요. 손님분들도, 예리 씨도 서로서로 익숙해져 보는 시간이 필요해요. 사람이 바뀌어서 가게 그림도 바뀌니깐요.’ 하시던 사장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단순히 주문을 받아내는 위치가 아님을, 커피를 마시기 전 기대와 선택을 온전히 감당하는 자리임을, 묘한 사명감이 드는 말이었다.
바에서는 비단 손님분과의 소통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바리스타 지근거리에서 생각과 모습을 선명하게 지켜보게 된다. 어쩌면 함께 부딪히기에 더 강제되는 주고받음이 있다. 건너편에 앉아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달까.
 
1 알바 첫날이라 11시 일찍 출근하며 발견한 냄비. 단골손님과 이야기하며 열심히 젓고 있는 사장님께, ‘사장님 뭘 끓이고 계세요?’ 물었다. 바닐라 시럽이란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이 바닐라 라떼의 맛을 궁금할 수밖에 없게끔 했다. ‘저희 바닐라 시럽 끓여서 써요. 바닐라 빈도 두가지 블랜딩해요. 타히티랑 마다가스카라 버본종. 두 가지 맛이 조금 다르거든요. 스파이시에는 로스팅한 팔각이 들어가요. 그래서 메뉴판에도 팔각을 그려두었어요.’
 
2 면적이 제일 넓어 많은 잔을 서빙할 때도, 설거지가 끝난 잔을 옮겨 낼 때도 불려지는 트레이가 있다. 나무로 된 한쪽 모서리를 그러잡다 보니 너덜너덜해진 부분을 조심해야지 쓰고 있던 일주일 차에 나였다. 하지만 선배님은 불편을 두고 보지 않으셨다. 어디선가 등장한 박스테이프를 오려 붙여 어딜 잡아도 안전한 모습을 갖추도록 만들었다. 한 잔 한 잔은 언제나 바리스타의 손을 거쳐야 함을, 그러니 우리가 먼저 편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함을 일깨우는 순간이었다.
 
곁에서 보면 느껴진다. 원두, 커피, 맛에 대해 말씀하시는 사장님의 표정은 진지하지만 순수하고 자신감 넘친다. 언제나 우리 가게의 흐름을 생각하는 선배의 말들은 다정하면서도 완고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진심인 두 사람을 보며 자연스레 녹아들고 싶단 생각을 한다. 이 사이에서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몰랐던 나의 모습

사장님의 오랜 고민으로 피어나는 맛, 선배의 행동력으로 단단해져가는 팀. 이 좋은 걸 나만 알 수는 없지. 한 잔에 각고의 노력이 담겨 있음을 진심 어린 표정과 담백한 표현으로 전해보기로 한다.
 
1 ‘케냐 마셔볼래요? 지금 너무 좋네!’ 하며 어느 날 사장님이 내어주신 컵. 맛을 보라는 신호다. 한 모금 홀짝 마시니, 기분 좋은 시트러스의 산미가 입에 퍼진다. 아직은 ‘맛있어요’라는 표현이 전부인 게 부끄러워 여러분들은 어떤 맛이 느껴져요? 괜스레 물어봤다. 선배는 ‘긍정적인 의미의 토마토 맛’이 난다고 했다. 이어 사장님은 ‘자몽 맛도 느껴지고, 저한테는 견과류…’ 내가 채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의 맛들을 쏟아내셨다. 이렇게나 다채로운 케냐의 맛, 조그마한 애착 수첩에 적어 남겨둔다. 그러곤 원두를 궁금해하는 내색을 살포시 비춰주는 분께 컵노트*를 하나씩 풀어본다.
‘케냐는 경쾌한 산미가 좋은 원두예요. 자몽스러운 달지않은 산미가 좋답니다.’ ‘원래 케냐는 산미가 강한 편인데, 오늘 오전에 맛봤을 때는 잔잔한 오렌지차처럼 마시기 좋더라고요, (쌀쌀해지는) 오늘 날씨에 마시기 좋을 거예요.’
*컵노트 : 커피가 가진 고유의 향미를 과일, 꽃, 견과류 등의 친숙한 재료로 표현해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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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코스터를 바꿔야 하겠어요.’ 얼음 잔과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며 흔적이 남아버린 코스터를 보며 선배가 넌지시 전한 말이다. 마침, 가을을 맞아 다시금 코스터 공장을 돌리기 시작한 나에게 번뜩 꽂히는 말이었다. 논문이 읽기 싫어지는 순간마다 위빙에 날실을 걸고, 셔틀을 통과시킨다. 파랑이 한 방울 섞인 연회색의 테이블과 나무 테이블에 어울릴 실을 골라 엮는다. 8개쯤 쌓인 코스터를 잘 감싸 카페에 들고가 꺼내 들며, 두 분 원하시는 걸 하나씩 고르면 선물하겠다 했다. 그리고 남은 건 괜찮다면 카페에서 써보면 어떠냐고 넌지시 덧붙인다. 그 말에 응해 사장님은 가치를 매겨 코스터를 사들여주셨다.
‘요즘 저는 저 코스터들을 편애해요. 종종 (손님분들이) 예쁘다고 해주세요.’ 잘 쓰고 있단 말을 독특하게 하는 사장님. 여기에 ‘쓰임을 다하는 걸 보니 저 너무 뿌듯해요. 자아실현 하는 기분.’이라 나는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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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 보인단 말

누가 봐도 내향인인 나에게 저런 면이, 스스로 다른 자아를 마주할 만큼의 사건이다. 오래간 INFJ로 살다, 2주간의 알바 후에 다시 검사한 결과는 ENFP였으니 천지개벽 수준이라 하겠다. 나의 지극한 커피 사랑을 지켜 본 지인들이 요즘 참 행복해 보인다 한다. 타인의 입으로 전해 듣지 않아도, 마음이 이미 충만한 상태임을 누구보다 잘 느낀 9월이다. 가까이 있는 것을 올바르게 마주하고 전해볼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내 풍요는 그곳에 자리하고 있지 않나. 항상 맞닿고 가닿게 하는 중심에 서있는 사람이고 싶다.